지난 주 저는 한국을 방문한 미국연방대법원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을 만나뵙는 기쁨과 영광을 누렸습니다. 8월은 연방대법원의 휴정기간으로, 긴즈버그 대법관의 이번 방한은 한미양국 사법체계에 대한 의견 교류를 목적으로 한국 대법원의 초청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지명을 받은 긴즈버그 대법관은 당시 미국 역사상 여성으로서는 두번째로 대법관에 임명되었습니다. 1956년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을 때 동기생 500명 중 여학생은 그녀를 포함하여 단 9명 뿐이었습니다. 여성이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한다는 사실이 매우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당시 로스쿨 학장은 여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남학생들이 들어올 수 있었던 자리를 왜 차지했느냐고 묻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1972년 긴즈버그 대법관은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의 여권신장 프로젝트를 창설하여 성차별 소송을 진행했습니다. 아들과 딸을 키우면서도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미국 최고 법원의 법관자리에 오른 긴즈버그 대법관은 성평등을 위해 싸우는 법조인들을 비롯한 후세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의 이번 방한에는 그녀의 딸이며 지적재산권 분야의 미국 최고 권위자인 제인 긴즈버그 컬럼비아 로스쿨 교수가 동행했습니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긴즈버그 대법관은 한국 대법원을 방문하여 한국 대법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대법원 건물도 둘러보았습니다. 특히 양승태 대법원장과 김소영 대법관과 소중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또한 한국 헌법재판소도 방문하여 사법 체계와 법치주의의 중요성 등 한미 양국 공통의 가치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의 서울 도착 직후, 저는 영광스럽게도 대사관저에서 환영 리셉션을 열 수 있었습니다. 한국 대법관 및 판사 여러분들이 참석했는데 흥미롭게도 그 중 권순일 대법관은 예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제인 긴즈버그 교수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 대학생들은 제가 사회를 본 ‘리얼 피플 토킹’ 프로그램을 통해 긴즈버그 대법관과 대화를 나눌 특별한 기회를 가졌습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자신의 성공은 가정과 공부의 균형을 잘 잡은데 있다고 학생들에게 조언을 했습니다. 또한 미국 대법관들은 평등하게 권한을 가지며 언론에 때때로 보도되는 것과는 달리, 서로를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중요한 이슈에 관하여 서로를 설득하기 위해 긴밀히 협조합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미국 대법원이 상이한 법적 관점이 존재하지만 본연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헌신적이고 공동의 책임을 가진 조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프로그램 중 비교적 가볍고 재미있는 순간이 있었는데요, 2013년 개막한 코믹 오페라인 ‘스칼리아/긴즈버그’에 대해 이야기 할 때였습니다. 이 오페라의 메인곡은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하나다’입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이 말한대로, 대법관들 사이에 의견차가 있을 수는 있지만, 대법원이라는 조직에 대한 존중에 있어서는 모든 대법관들이 하나인 것입니다.
학생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했으며 훌륭한 질문을 많이 던졌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판결에 대한 질문도 있었습니다. 또 수십년 전, 여성으로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것이 어땠는지에 대해 궁금해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주제를 비롯하여 정의의 개념과 관련한 어려운 이론적 질문과 정의가 문화에 따라 변하는지, 그리고 시민들은 자신이 부당하다고 여기는 법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한 긴즈버그 대법관의 답변을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학생들이 진지한 고민 끝에 질문을 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긴즈버그 대법관은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분들과 만나 저녁을 함께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기회도 가졌습니다. 그녀는 인권의 수호자이며 동성결혼의 주례를 선 적도 있습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대법관으로 임명되기 전 역사적으로 중요한 판례를 남긴 중요한 소송 여러건을 맡은 경험이 있습니다. 심지어 당시 판사 전원이 남성이었던 재판부 앞에서 변론을 한적도 여러번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리드 대 리드 사건입니다. 샐리 리드는 아들이 사망한 후 고인이 된 아들의 재산 관리인이 될 것을 요청했으나 그녀의 남편 또한 뒤이어 같은 요청을 했습니다. 법원은 아이다호 주법이 상속사건의 경우 남성이 여성보다 우선권을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는 이유로 샐리의 남편을 재산 관리인으로 지정했습니다. 1971년 당시 변호사였던 긴즈버그는 샐리 리드를 변호했으며 해당 법은 연방 대법원에 의해 위헌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그녀는 또한 사별한 아내만 (사별한 남편은 제외) 자녀양육 특별 수당의 수혜자가 될 수 있게한 법을 바꾸는데 일조하여 남성들도 성별에 근거한 차별을 당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방한기간동안 긴즈버그 대법관은 국립중앙박물관과 창덕궁 비원을 방문하고 맛있고도 건강에 좋은 사찰 음식을 맛보는 등 한국의 풍부한 문화유산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은 여러 세대에 걸쳐 영감을 주신 분이며 나탈리 포트만이 긴즈버그 대법관 역을 맡은 영화도 개봉할 예정입니다. 제가 긴즈버그 대법관의 이번 방한을 함께하며 확실하게 느낀 점은 그녀에 대한 높은 관심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걸출한 인물이며 복잡한 법적 이슈를 매우 명료하게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연방 대법원의 최고령 법관이지만 가장 세련된 멤버이기도 합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의 별명인 노토리어스 R.B.G.를 들어보셨을 겁니다(그녀의 영문 이름 이니셜과 사망한 래퍼 노토리어스 B.I.G.의 이름을 합성한 것입니다). 이 별명에 관한 질문을 받고, 긴즈버그 대법관은 노토리어스 B.I.G.와 자신이 적어도 한가지 공통점은 있다고 농담으로 말했습니다-둘다 뉴욕 브루클린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미국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 위대한 여성입니다! 미국에 대한 그녀의 공헌에 감사하며 방한기간 동안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 제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지명을 받은 긴즈버그 대법관은 당시 미국 역사상 여성으로서는 두번째로 대법관에 임명되었습니다. 1956년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을 때 동기생 500명 중 여학생은 그녀를 포함하여 단 9명 뿐이었습니다. 여성이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한다는 사실이 매우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당시 로스쿨 학장은 여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남학생들이 들어올 수 있었던 자리를 왜 차지했느냐고 묻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1972년 긴즈버그 대법관은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의 여권신장 프로젝트를 창설하여 성차별 소송을 진행했습니다. 아들과 딸을 키우면서도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미국 최고 법원의 법관자리에 오른 긴즈버그 대법관은 성평등을 위해 싸우는 법조인들을 비롯한 후세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의 이번 방한에는 그녀의 딸이며 지적재산권 분야의 미국 최고 권위자인 제인 긴즈버그 컬럼비아 로스쿨 교수가 동행했습니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긴즈버그 대법관은 한국 대법원을 방문하여 한국 대법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대법원 건물도 둘러보았습니다. 특히 양승태 대법원장과 김소영 대법관과 소중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또한 한국 헌법재판소도 방문하여 사법 체계와 법치주의의 중요성 등 한미 양국 공통의 가치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양승태 대법원장 예방
긴즈버그 대법관의 서울 도착 직후, 저는 영광스럽게도 대사관저에서 환영 리셉션을 열 수 있었습니다. 한국 대법관 및 판사 여러분들이 참석했는데 흥미롭게도 그 중 권순일 대법관은 예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제인 긴즈버그 교수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 대학생들은 제가 사회를 본 ‘리얼 피플 토킹’ 프로그램을 통해 긴즈버그 대법관과 대화를 나눌 특별한 기회를 가졌습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자신의 성공은 가정과 공부의 균형을 잘 잡은데 있다고 학생들에게 조언을 했습니다. 또한 미국 대법관들은 평등하게 권한을 가지며 언론에 때때로 보도되는 것과는 달리, 서로를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중요한 이슈에 관하여 서로를 설득하기 위해 긴밀히 협조합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미국 대법원이 상이한 법적 관점이 존재하지만 본연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헌신적이고 공동의 책임을 가진 조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프로그램 중 비교적 가볍고 재미있는 순간이 있었는데요, 2013년 개막한 코믹 오페라인 ‘스칼리아/긴즈버그’에 대해 이야기 할 때였습니다. 이 오페라의 메인곡은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하나다’입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이 말한대로, 대법관들 사이에 의견차가 있을 수는 있지만, 대법원이라는 조직에 대한 존중에 있어서는 모든 대법관들이 하나인 것입니다.
학생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했으며 훌륭한 질문을 많이 던졌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판결에 대한 질문도 있었습니다. 또 수십년 전, 여성으로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것이 어땠는지에 대해 궁금해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주제를 비롯하여 정의의 개념과 관련한 어려운 이론적 질문과 정의가 문화에 따라 변하는지, 그리고 시민들은 자신이 부당하다고 여기는 법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한 긴즈버그 대법관의 답변을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학생들이 진지한 고민 끝에 질문을 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긴즈버그 대법관은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분들과 만나 저녁을 함께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기회도 가졌습니다. 그녀는 인권의 수호자이며 동성결혼의 주례를 선 적도 있습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대법관으로 임명되기 전 역사적으로 중요한 판례를 남긴 중요한 소송 여러건을 맡은 경험이 있습니다. 심지어 당시 판사 전원이 남성이었던 재판부 앞에서 변론을 한적도 여러번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리드 대 리드 사건입니다. 샐리 리드는 아들이 사망한 후 고인이 된 아들의 재산 관리인이 될 것을 요청했으나 그녀의 남편 또한 뒤이어 같은 요청을 했습니다. 법원은 아이다호 주법이 상속사건의 경우 남성이 여성보다 우선권을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는 이유로 샐리의 남편을 재산 관리인으로 지정했습니다. 1971년 당시 변호사였던 긴즈버그는 샐리 리드를 변호했으며 해당 법은 연방 대법원에 의해 위헌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그녀는 또한 사별한 아내만 (사별한 남편은 제외) 자녀양육 특별 수당의 수혜자가 될 수 있게한 법을 바꾸는데 일조하여 남성들도 성별에 근거한 차별을 당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방한기간동안 긴즈버그 대법관은 국립중앙박물관과 창덕궁 비원을 방문하고 맛있고도 건강에 좋은 사찰 음식을 맛보는 등 한국의 풍부한 문화유산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창덕궁 비원을 찾은 긴즈버그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은 여러 세대에 걸쳐 영감을 주신 분이며 나탈리 포트만이 긴즈버그 대법관 역을 맡은 영화도 개봉할 예정입니다. 제가 긴즈버그 대법관의 이번 방한을 함께하며 확실하게 느낀 점은 그녀에 대한 높은 관심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걸출한 인물이며 복잡한 법적 이슈를 매우 명료하게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연방 대법원의 최고령 법관이지만 가장 세련된 멤버이기도 합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의 별명인 노토리어스 R.B.G.를 들어보셨을 겁니다(그녀의 영문 이름 이니셜과 사망한 래퍼 노토리어스 B.I.G.의 이름을 합성한 것입니다). 이 별명에 관한 질문을 받고, 긴즈버그 대법관은 노토리어스 B.I.G.와 자신이 적어도 한가지 공통점은 있다고 농담으로 말했습니다-둘다 뉴욕 브루클린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미국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 위대한 여성입니다! 미국에 대한 그녀의 공헌에 감사하며 방한기간 동안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 제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